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드라마)/역사적 사실과의 비교 (문단 편집) === 제24회 ~ 제25회 === * 극중에서 최영이 요동정벌론을 제시하자 많은 중신들이 반대하는데 실제 역사상에서 친명파 사대부의 반대가 심했던 것은 사실이다. * 극중에선 4불가론을 제시했을때 우왕과 최영이 같이 호통을 치며 이성계를 극딜했고 전략상 조언부분은 스킵되었으나, 기록상으론 4불가론을 제시했을때의 분위기는 그렇게 과격하지 않은 편이었다. 우왕도 '듣고보니 그럴싸한데?' 정도로 생각했고, 최영도 그렇게 엄청나게 격정을 내면서 의견을 무시한게 아니라 수시중 이성계의 위치를 생각해서인지 이성계의 앞에서는 동의하는듯 말하면서 나중에 우왕과 독대하여 재설득해 마음을 돌려놓는 방식으로 처리했다. 다만 실제 기록에서 전략상 조언을 할때에는 꽤 언성이 격해졌긴 했다. 게다가 정 원정을 하려고 하신다면 가을까지만이라도 원정을 연기해달라는 이성계의 발언이 완전히 빠졌다. 극중 진행을 위해 압축하다보니 이리 묘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 [[위화도 회군]] 때 남은이 정도전에게 '회군'이라 적힌 서찰을 받고 이성계에게 회군을 해야한다고 말하는데, 실제 역사에서 남은은 회군 여론을 조성해 이후 '무진회군공신'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남은이 회군과정에서 회군을 주도하는 명분을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정도전과의 연계는 각색. * 건원칭제가 묘사되었다. 최영이 요동 정벌을 선언하면서 연호를 쓰고 우왕을 황제로 받들 것이라 한것. 그러나 사서에서는 우왕과 최영이 기존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로 돌릴 것을 선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부분은 각색이 좀 심한 부분이긴 하다.[* 게다가 정황상 당시 건원칭제를 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설령 고려의 요동 공격이 성공한다고 가정해도 결국 고려는 명나라와 협상을 해서 사태를 수습해야 했을 것이다. 고려가 용케 요동을 점령하고 명나라와 교섭이 시작됐다고 전제해 보자. 그때 명나라가 만약 건원칭제 사실을 알면 고려의 협상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됐을 것이다. 명나라가 건원칭제를 중단하라고 요구하면 고려는 건원칭제를 지켜내는 대가로 다른 걸 포기해야 할 수 있다. 협상이 결렬될 수도 있는 일이고. 그렇다고 그때 가서 건원칭제를 취소하면 국내적으로 우왕의 권위가 실추되는 등 정치적으로 엄청난 타격이 될 것이니 딜레마에 빠진다. 우왕과 최영이 당시 성급하긴 했지만 설마 여기까지 생각 못 했을까? 이런 정황 때문에 건원칭제가 요동 정벌 직전에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추진됐을지 매우 미심쩍다. 그리고 고려가 외왕내제를 하던 시절에도 독자 연호는 거의 쓰지 못했고 [[요나라]]와 [[금나라]]의 연호를 쓴 경우가 많은데, 우왕 때 황제 칭호를 쓰는 것(칭제)을 넘어서 독자 연호를 선포하는 것(건원)까지 하는 건 굉장한 무리수이다.] 다만 최영이 요동을 정벌하고자 하는 뜻이 옛 고려의 영광 나아가서는 고구려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당위성을 설명하려면 우왕을 황제로 떠받드는 것 역시 어느 정도 납득이 가긴 하다. 또한, 이색과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사대부들은 우왕을 황제 폐하로 부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것 또한 묘사되었다. 한편 건원칭제(建元稱帝)라는 용어 자체도 엄밀히 말하면 재현 오류다. 당시 고려는 태조 [[왕건]]의 이름을 [[피휘]]하느라 '건(建)' 대신 '립(立)' 자를 썼으므로 건원칭제가 논의됐으면 입원칭제(立元稱帝)~~병원에 입원하는 게 아니다~~ 등으로 불렀을 것이다. 다만 사극에서 피휘를 무시하는 건 재현 오류라기보다 자막이나 해설로 설명하느라 산만해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 요동 정벌에 출정한 사람으로 정지, 박위 등이 언급되었지만 누군지는 구분이 되지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